의승장 영규대사를 만나다.
전나무에 이끌려 다가서다 길가의 보호각 앞에서 발길을 멈춰 볼 일이다.
700의총의 승병장 영규대사의 ‘의병승장비’보호각이이 있기 때문이다.
의병승장비는 숙종 5년(1839)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비각을 부수고 비를 땅에 묻는 만행을 저지른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해방후 비를 다시 세우고 보호각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월 1일이 의병의 날로 제정되고
의승병들의 역할도 함께 짚어본다면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운 3분의 대표적 승장이 있다.
한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서산대사(1520~1604),
평양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사명대사(1544~1610),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영규대사(?~1592) 등이 그들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여생을 마쳤지만
영규대사는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고 전사한 비운의 인물이다.
청주성에서 큰 승리로 왜의 발목을 잡은 영규대사
영규대사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승병 1천명을 모집하여
왜군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이후 영규대사는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에 임하게 되는데,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청주 방어사 이옥의 관군이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 영규대사의 군대만이 홀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방어사 이옥의 잔류군사와 의병장 중봉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함께
합군(合軍)하여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의 수복만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도로 진출하는데 교두보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큰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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