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여행

소수서원을 다녀온 뒤에 적은 감상을 보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하얀벼리 2012. 5. 24. 06:00

춘천 문화원의

문화해설사반 회원들이 함께 현장 답사로

영주의 소수서원을 다녀왔습니다.

많은 관심있는 분들이 참여하여 재미있는 여행이었고

함께한 교수님의 설명으로 더욱 진지한 문화재를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다녀온 기록을 적기전에

먼저 글을 써 주신 분이 있어 함께 나누어 보고자 글을 올립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단상

                                                                                          김영칠

 

 

춘천문화원 문화유산반 회원들과 함께 역사여행길에 올랐다.

개인적으로는 학수고대해 오던 ‘오래된 미래’와의 만남이다.

가는 곳은 동방의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알려진 순흥의 소수서원.

춘삼월 호시절, 새봄이 무르익는 남녁길은 주마간산하는 매력이 그만이다.

남으로 곧게 뻗은 국토의 대동맥위를 무수한 삶들이 교차한다.

울긋불긋 현란한 색상으로 몸단장을 시작한 산하가 순식간에 달려오고 찰나처럼 아득히 멀어져 간다.

치악재에서 벗어나 풍기로 접어들었다.

 

풍기는 개성, 금산과 더불어 예부터 인삼으로 유명한 고장인데, 특히 풍기와 개성인삼은 주세붕 선생과 관련이 깊다.

주세붕선생이 고을 원을 지낼 때 어려운 백성들의 살림보탬을 위해 인삼재배를 권장한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어진 목민관이셨던 선생은, 또한 이 고장에 사학(私學)을 열어 영남유학의 터전을 닦으셨으니,

말하자면 예향의 관문에 들어선 셈이다.

옛적 같으면 의관정제하고 ‘어흠’ 큰 소리로 행세를 기별해야 하지만,

낡아버린 세월 탓에 고래의 풍광과 예절도 바래졌으니,

하마(下馬)를 하지 않고 지나치는 나그네의 비례를 탓할 이도 없을 듯하다.

 

옛길이나 다름없는 국도를 따라 구불구불 수십 여분을 달려 소수서원에 닿았다.

현재는 영주시 순흥면 내죽 2리. 본래 순흥은 순흥 안씨의 관향으로 이곳 출신인

여말의 안향선생이 중국에서 유학을 최초로 들여왔고,

조선조 태종 때까지만 해도 종3품의 부사가 머물면서

풍기, 단양, 영춘, 제천, 청풍 등을 관할하던 막강한 도호부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년) 이곳으로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관련자들이 모두 참살되고 도호부도 폐부(癈府)를 당하였다.

복설(復設)되어 명예를 회복한 것은 그로부터 227년 후의 일이다.

 

정치적으로 만고풍상을 겪으면서 한과 시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순흥에

정신적 가치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전통사학이 세워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같기도하다.

시절의 아픔에 대한 하늘의 보상인가?

정축지변(丁丑之變)의 참극으로 한 고을이 쑥대밭으로 버려졌을 때

이를 추스르고 재기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심어준 것은

살육과 탐욕에 물든 창칼이 아니라 한 선비의 애끓는 사명감이었다.

찬탈의 참극으로부터 85년 후인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선생은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이 젊은 시절 수학하였던 숙수사 터에

사묘를 건립하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열었다.

 

다시 7년 후 풍기군수로 온 퇴계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국가의 공식교육기관으로 지정해 달라는 상소를 제기

이듬해 조정에서 ‘소수서원’ 편액과 함께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란 은택이 내려졌다.

이러한 연고로 대원군의 서슬퍼런 서원철폐령에도 끄떡 없이 건재하면서

조선 말까지 300여 년간 무려 4,000여명의 인재를 길러냈다.

소수서원이 배출한 인물 중에는 임진왜란 때 죽음직전의

이순신장군을 적극 변호하여 살려낸 약포(藥圃) 정탁(鄭琢)선생을 비롯하여

일본통신사로서 잘못된 보고를 자책하고 영남(嶺南)초유사(招諭使)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죽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선생과 그의 4형제등 많은 선비들이 있다.

 

소수서원은 조선유학의 뿌리이자 퇴계학의 시원이 되는 곳이다.

영남유학의 태두인 퇴계선생은 공적으로 이곳을 관할하는 고을관장이면서

사적으로는 인근일대에 그의 태실지와 함께 처가와 아내무덤이 있어서

서원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다.

퇴계선생의 도산서원이 있는 예안은 원래 순흥 땅으로

조선시대에는 영천현감이 다스리기도 했었다.

 

조수같은 시대변하의 물결 속에 전통문하와 가치관이 함몰되는 위기를 맞고 있다.

오늘날 소수서원은 즐기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한갓 풍치 좋은 관광지

의무적인 수학여행단 학생들에게는 캐캐묵고 고리타분한 유물전시장 쯤으로 전락한 감이 없지도 앉다.

그러나 이곳의 고색창연한 속살에 서려진 400 여년의 지혜를 무심히 지나치기엔

우리의 감성이 너무 진지했고 노정(路程)은 뜨거웠다.

 

퇴락한 지붕에 얹혀진 세월의 두께 폐사(廢寺)의 초석위에 올려진

당우(堂宇)의 아량과 여유, 당간지주와 홍전문(紅箭門)의 공존,

전통의례와 풍수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건물배치의 전통미,

옹색하고 단촐한 듯하지만 절제의 구도 속에 묻어있는

옛 선비들의 호연한 체취와 극기면려의 정신이 나그네의 가슴을 찡하게 울려주었다.

 

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수 건너에는 적색의 한자로 ‘敬(경)’이라고 새긴 바위가 발을 물에 담구고 있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는 이들도 없는 것 같았다.

언뜻보면 낙서꾼들의 장난쯤으로 비쳐질 수 도 있고 좀 안다하는 이들 중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나 다른 뜻으로 적당히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경자와 경자바위의 내력은 말할 수 없이 심오하고 스산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敬(경)’은 선비들의 정신함양의 요체이다.

요즘 말로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할 일체행위의 준칙이라 할까?

일에 전념함에 있어서 심신이 통일되거나 집중되는 경지를 뜻하는데

사실 유학에서 따지는 철학적 의미는 이보다 더욱 엄격하고 철저하다.

선비가 마음수양을 하고 글공부를 함에 있어 스스로를 통제하여 갈고 닦는 과정은

마치 득도에 이르기 위한 스님들의 용왕매진 자세와 닮았다고나 할까?

 

퇴계선생의 사물(四物)잠(箴)이나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의 핵심도 ‘경‘ 한글자로 요약된다.

서원 앞에 ’경‘자를 각인한 설립자 주세붕선생의 깊은 뜻이 여기 있는 것이다.

당초에는 무색이었는데 정축지변으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울음을 진혼하기 위해

붉은 칠을 한 후부터 곡성이 없어졌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조선은 유교국가요, 사대부국가였다.

나라의 기본틀이 유학의 토대위에 성립되어 500 여년을 한결같이 였다.

특히 조선의 성리학은 편향된 주지주의와 문약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퇴계의 영남학파와 율곡의 기호학파로 대별되면서 철학적 논리를 더욱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서 조선왕조의 명맥을 굳건히 지켰다.

 

세계역사상 한 국가의 수명이 이처럼 오랜 예는 없다고 한다.

서양의 경우에는 비례(比例)가 없고, 동양의 경우는 중국의 진나라가 40년,

청나라는 260년, 한나라는 400년, 제일 강성했던 몽고의 원나라는 고작 100여년에 그쳤다.

일본의 막부정권도 200여년이 한도였다.

그에 비해 우리의 역대 왕조들은 한결같이 장수했다.

고구려 705년, 백제 678년, 고려는 475년, 신라는 무려 992년.

 

이러한 장수의 비결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선비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아득한 소도(蘇塗)시대의 신성(神性)으로부터 고구려의 상무정신,

신라의 화랑도, 고려의 개방과 융화, 조선의 위정척사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 속에 살아있는 우리 얼의 본질이다.

우리가 비록 초현대의 현실을 누리고 있지만,

우리의 몸속에는 5,000년 이상을 이어온 선비정신의 DNA 가 도도히 흐르고 있음에랴!

 

울울창창한 500년 학자수 군락속의 소혼대(消魂臺)에 앉아 있노라니 청운의 꿈을 안고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낭낭한 음성이 들리는 듯도 싶다.

붓 한자루로 사직을 떠 받쳤던 옛님들도 떠 오른다.

유장한 죽계수(竹溪水) 위에 취한대(翠寒臺)의 그림자가 아름답다.(끝)

 

                                                                                    김영칠님은 현 문화원연합회 강원도지부의 사무처장으로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