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경상도여행

덕천서원과 남명조식의 유적지

하얀벼리 2012. 1. 31. 20:19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있는 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1576년(선조 9)에 창건되었으며, 조식(曺植)의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했으며, 그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0년대에 유림들에 의해 복원되었다.

출처 브리테니커백과사전

 

덕천서원의 입구 맞은편에는

먼저 눈에띄는 정자가 있다.

이름하여 '세심정'

아마도 마음을 씻는 정자라는 뜻이지 싶다.

 

 

 

세심정에서 바라보이는 덕천서원

 

입구에 덕천서원의 안내가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홍살문 안쪽으로 시정문을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덕천서원

 

오른쪽의 생활공간인 진덕재

 

 

왼편의 생활공간인 수업재

 

 

서원의 안쪽에 경의당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경의당은 경과 의를 중시하는 교육공간임을 알려주는 현판인 듯하다.

 

 

 

서원엔 아직도 공부가 계속되는지 나는 알지 못할 글들과 이름들이 씌여져 붙어 있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남명선생의 위폐가 모셔져 있고 일년에 두차례의 향례를 올리며

일년에 한번 남명제를 지낸다.

 

 

 

서원의 마당에 커다란 차나무가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차꽃이 마저 지지 못하고 피어있는 것이 신기하여 찍어보았다.

 

 

사상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宋)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조식은 우리 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척신 정치에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냈던 남명은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평가

18세기의 실학자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 따로 '남명선생문'이란 항목을 두고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는 조식 자신의 말을 인용하였다. '남명선생시'라는 항목에서는 "천 석 무게의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거나?"(「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시)라는 부분을 들며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출처: 위키백과

 

 

새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남명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벼슬에 나가기를 사양하고 경과 의를 추구하던 선비가

후학을 위해 봉사하던 남명서원을 들러

선거에 출마하려는 어느분의 명함을 받아쥐며

선거를 앞둔 우리시대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