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문인화작품

이하응과 민영익의 난그림

하얀벼리 2011. 8. 17. 07:00

사군자 그리기를 배우기전 작품 감상을 먼저 해보겠습니다.

 

난초그림의 쌍벽

 

 

대원군(이하응)과 민영익의 난초 그림

 

난초 그림은 19세기에 성행했고 그 중에도 대원군과 민영익(1860~1914)이 쌍벽을 이뤘다. 이들의 난초는 회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지만 그들의 화풍은 사뭇 대조적이다. 대원군의 난초는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다면 민영익의 난초는 부드럽고 원만하다.

 

이 대조적인 화풍은 그들의 판이한 인생을 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롭다.

 

 

 

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한쪽에 한 떨기 춘란(春蘭)을 즐겨 그렸다.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는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는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 나간다. 반면 민영익의 난초는 여백이 없다. 줄기는 가늘고 고르며 일정하고 끝부분이 뭉툭하다.

 

대원군의 난초는 힘차고 화풍은 그의 파란 만장한 인생 역정과 비숫하다.

처절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그의 야망과 숱한 좌절이 날카로움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해동거사(海東居士)란 낙관이 있는 난초는 실각한 후에 운현궁에 눌러 앉았던 1881년 줄기 하나에 울분이 꿈틀거린다.

 

 

 

 

 

한편 민영익은 다르다. 그의 왕실 외척으로 태어나 20대 초반에 미국 유럽을 돌며 서양 문물에 눈을 뜨고 요직을 두루 거치지만 야심 보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던 인물이다.

 

중국에 유폐된 대원군의 귀국을 반대했던 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1894년 중국으로 망명 그곳의 문인화가들과 함께 사군자를 그리며 말년을보냈다. 국립 박물관 이원복 학예연구관은 ‘그의 중국생활은 국제조류에 뒤지지 않는 독특한 경지의 난초를 탄생새켰다.’고 평한다.

구한말 격변기, 두 사람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겠지만 한국 회화사에 난을 활짝 꽃 피웠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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